[2021년 10월의 독립운동가] 장지영·김윤경·권덕규 선생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장지영(1887~1976), 김윤경(1894~1969), 권덕규(1891~1950)선생을 2021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장지영·김윤경·권덕규 선생은 일제의 우리말 탄압에도 꿋꿋하게 한글을 연구하고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데 큰 공을 세우신 분들이다. 이분들의 노력으로 일제강점기에도 우리말의 보전과 과학적 연구가 가능했으며, 민족의 얼을 지킬 수 있었다.
장지영(張志暎) 선생은 1905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 한어과(漢語科)를 졸업하고 7월부터 주시경 선생을 찾아가 3년간 한글문법을 배웠다.
1912년부터 상동교회가 설립한 상동청년학원 교사 겸 학감으로 근무했다.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 활동은 청년 장지영 선생의 삶에 큰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당시 상동교회는 지식인과 민족운동가들이 모인 계몽운동의 산실이었다. 조국독립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와도 밀접하게 관계가 있었다.
장지영 선생은 1914년 상동청년학원이 강제 폐교당하자 배재학교와 경신학교로 옮겨 국어와 수학을 교육했다. 다른 학자들과 주시경 선생의 이념을 계승하고 한글을 체계화하기 위한 학술활동에 집중했다. 이를 위해 1921년 12월 권덕규·김윤경 선생 등과 휘문의숙에서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조선어연구회’는 1909년에 주시경 선생이 조직한 국어연구학회를 계승한 한글 연구 단체이다.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法理) 연구를 목적으로 한글연구와 표준어 확립, 사전 발간 사업을 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일방적인 맞춤법 규정에 대응하여 한국어의 특징에 부합하는 맞춤법을 마련하는 등 한국어와 한국문화 보호에 힘썼으며 1927년 2월 최초의 국어 전문잡지인 「한글」이 창간되었다.
조선어연구회는 1930년 12월 정기총회에서 독자적인 철자법 제정을 결의하여 장지영·김윤경·권덕규 선생 등이 중심이 되어 맞춤법 안을 작성했다. 1931년 조선어연구회를 개편한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제정위원으로 선출되어 맞춤법안을 계속 연구한 결과, 1933년 10월 드디어「한글맞춤법통일안」을 공표할 수 있었다.
또한 1929년 10월 한글날 기념식에서 각계 인사 108명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고, 장지영 선생은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참여하여 한글사전 편찬에도 기여했다. 1935년 1월부터 시작된 표준어 사정(査正)에 참여하여 2년간 약 1만 개의 어휘를 정립하였으며, 마침내 1942년 『조선어대사전』이 발행되었다. 이는 일제에 의해 민족말살 정책이 지속되던 시기에 우리민족 고유의 언어를 체계화 한 점에서 의미가 크며, 나아가 우리민족의 정체성과 민족성을 지켜낸 학술적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조선어학회의 성장과 한글연구 발전이 식민통치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에 대한 탄압을 단행했다. 정지영 선생은 이극로·최현배 선생 등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함흥경찰서에 수감되었다.
모진 고문과 취조 끝에 1944년 10월 예심면소로 석방되었으나 후유증인 신경통으로 평생을 고생했다. 게다가 불온사범으로 간주된 탓에 안정적인 주거와 직업을 얻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광복 이후 이극로·최현배 선생 등 한글연구자들도 출옥하여 한글사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먼저 한자 폐지 및 한글 전용을 추진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빛을 보지 못했던『조선말 큰 사전』1·2권의 발간을 했고,『국어입문』(1946.6),『가려뽑은 옛글』(1948.8) 등 저술도 이어졌다.
장지영 선생은 1945년부터 48년까지 문교부 편수부국장, 1945년부터 58년까지는 연세대학교 교수로 봉직했으며 평생 한글연구에 매진하였다.
김윤경(金允經) 선생은 15세까지 고향에서 전통학문을 배우다가 서울로 유학하여 기독교 계통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1911년 1월 서울 남부 상동(尙洞)의 사립청년학원(私立靑年學院)에 입학하여 평생 은사인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한글을 배웠다. 이때 외국에서도 한국의 우수성이 중시된다는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국어 연구를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청년학원 졸업 이후 마산 창신학교 교사를 지냈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한글 연구에 매진하였다. 이후 1921년 12월 장지영‧권덕규 선생 등과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였다. 학회 회원들과 연구 활동 끝에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둔 1922년 1월「우리말과 글의 예와 이제를 보아 바로 잡을 것을 말함」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작성했다.
또한 선생은 『조선어사전』편찬위원으로 선임되어, 한글연구를 체계적으로 진행하였고, 1934년부터 릿쿄대학 졸업논문을 기초로『조선문자 급 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집필을 시작했다.
선생은 조선어학회에서 추진한 한글사업 분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0년에는〈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31년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에도 선출됐다.
아울러 한글 교육과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1931년 동아일보의 지원으로 권덕규 선생 등과 전국을 순회하여 한글을 강습했다. 수많은 청년 대중에게 국어지식을 교육하여 한글에 대한 관심과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1934년 5월에는 한국사와 한국어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진단학회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우리나라 말과 역사를 연구하는 국학운동에 매진했다.
선생은 1937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실직과 고문후유증을 겪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한글 연구는 멈추지 않았으며, 1938년 수감 중에 그의 연구를 집대성한『조선문자급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가 발간되었다. 오랫 재판 끝에 1941년 10월 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그는 1942년 4월부터 성신가정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조선어학회는 한글 연구자들로 구성된 한글 연구기관이자 학술단체였다. 그럼에도 일제는 보다 강력한 전시동원과 대중수탈을 위한 민족말살통치를 위해 조선어학회를 해산시켜 한글연구의 뿌리를 뽑고자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을 일으켜 선생을 비롯한 장지영‧권덕규 선생 등 수 많은 한글학자들을 체포했다. 선생도 1년간 가혹한 옥고를 치루고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48년 국어문법서인『나라말본』과『중등말본』을 출판했다. 이는 1910년에 주시경 선생이 출판한『국어문법』을 계승한 것이었다. 선생은 1925년『조선말본』을 편찬한 이래 1957년 해방 이후까지 총 7권의 문법서를 발간했다.
선생은 1945년 8월 조선어학회 상무이사가 되었고, 동년 10월에는 모교인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이후 연희전문학교 총창 대리로 임명되어 연세대학교를 운영하고 민족교육 사업에 주력하였다.
권덕규(權悳奎) 선생은 1910년 서울 휘문의숙에 입학했으며, 한글운동의 최고 권위자로 휘문의숙에 출강하던 주시경 선생을 만났다. 이를 계기로 선생은 일찍이 한글연구에 입문햇다. 더불어 한국 고유의 고전을 정리하고 간행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광문회 사업에 참여하였다.
이곳에서 김두봉·이규영 선생과 함께 주시경 선생을 도와 최초의 한글 사전 『말모이』편찬에 참여하였다. 선생은 오직 한글 보존의 일념으로 추진된『말모이』편찬을 1914년 주시경 선생 사망 이후에도 이어갔다.
선생은 1919년 12월부터 1920년 1월까지 8회에 걸쳐《매일신보》에 연재한「조선어문(朝鮮語文)에 취(就)하야」라는 논설을 통해 한글연구 이론을 강의했다. 여기서 본인이 정립한 이론 체계를 분야별로 나누어 설명했고, 한글 사용의 단점을 논하면서 가로쓰기 도입도 주장했다.
이러한 연구 활동으로 1923년『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가 발간되었다. 이 저서에서 기존 선생의 한글 이론과 어원 연구 성과가 집대성되었다. 이는 한국어와 한국문화가 탄압받던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한국어 이론서이자 교과서로써 의미가 있다. 선생은 무엇보다도 음운학‧구조학과 구별되는 어원 연구에 집중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위원회에도 참여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어학회와 동아일보가 주관하는 조선어강습회의 강사로 참여했으며,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선생은 1930년 동아일보가 창간 10주년을 기념하여 진행한 특집 기사에서 ‘조선어문 공로자’로 선정되었다.
1931년 1월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개편되었고, 선생은 한글맞춤법 제정과 표준어 사정(査定), 외래어 표기법 확립 등 사전편찬을 위한 준비작업에 매진했다.
선생은 1930년 맞춤법 제정위원으로 참여하고, 1932년에는 한글학자 17명과 함께 조선어철자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때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임하며 전국적으로 한글강연회를 다녔다. 그리고 1936년부터 조선어학회에서 발족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에도 참여했다.
1942년 9월 함경남도 홍원경찰서는 민족정신 교육 혐의로 영생고등여학교 교사이자 사전편찬 참여자인 정태진 선생을 출두시켜 가혹하게 고문했다. 그 결과 조선어학회가 민족운동 단체라는 취지의 허위자백을 받아 냈다. 이를 빌미로 10월 일본 경찰이 서울의 조선어학회 회관을 급습했다. 그 결과 장지영·김윤경 선생 등 11명이 구속되어 함흥과 홍원으로 압송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다음 해인 1943년 3월까지 조선어학회 관계자 17명이 추가로 구속되었다. 이때 선생은 1940년부터 중풍이 있었고, 와병 중인 탓에 구속되지는 않았으며, 1943년 4월에 기소정지 처분을 받았다.
광복 이후에도 몇몇 발기인에 서명을 했으나, 병마로 인해 활발한 활동은 하지 못하고 1945년에 이전에 써놓은 조선유기, 조선유기략을 축약 편집한 『조선사(朝鮮史)』를 간행했고 1946년에는 수필과 기행문을 모아『을지문덕(乙支文德)』을 발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장지영 선생과 김윤경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그리고 권덕규 선생에게는 2019년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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